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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이 보여준 사랑은 분명 복음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주변에는 복음과는 전혀 다른, 오히려 복음을 왜곡한 ‘거룩함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집단적 죄악’이 버젓이 존재합니다. 여기에는 교회, 수녀원, 그리고 그 구조에 침묵하며 동참한 마을 사람들까지 포함됩니다.


1. 제도화된 죄 — 바리새인의 위선

수녀원과 교회 조직은 ‘타락한 여성들’을 구제한다는 명분으로 오랜 시간 여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죄를 넘어선 ‘구조적인 죄’입니다. 이들은 외적으로는 경건하고 의로운 조직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약자를 억누르며 자신들의 권위와 체제를 유지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는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의 위선과도 닮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율법을 지킨다 하면서 정의와 자비를 외면하는 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교회가 이러한 행위에 침묵하고 방조했다면, 이는 복음의 본질을 배반한 것이며, 사랑이 아닌 권위와 통제를 신의 이름으로 행사한 죄라 할 수 있습니다.


2. 마을 사람들의 침묵 — 빌라도의 손 씻음

빌이 맞닥뜨린 가장 큰 장벽은 사실 마을 사람들의 무관심과 두려움입니다. 그들은 모두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고, 누구도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빌의 행동을 우려하며 조용히 있으라고 말합니다.

 

이 모습은 성경에서 빌라도의 태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예수께서 무죄인 줄 알면서도 민중의 소리를 두려워하여 그의 손을 씻고 예수를 넘깁니다.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선고 지연)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 너희가 알아서 하라." (마태 27,24)

마을 사람들의 침묵은 악을 허용한 것이고, 결국 그들 역시 공동체적 죄악에 참여한 것입니다.


3. 사랑 없는 진리 vs. 진리 안의 사랑

수녀원과 교회는 ‘정결’, ‘회개’, ‘질서’ 같은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그 속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진리의 하느님이지만, 동시에 ‘자비의 하느님’이기도 하십니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곧 폭력이 되고, 신의 이름으로 포장된 죄악이 됩니다.

 

반면, 빌은 작은 진실과 사랑의 행위로 하느님의 뜻을 실현합니다. 그는 설교하지 않고, 교리를 가르치지 않으며, 복음을 외치지도 않지만, 그 삶 전체가 복음의 구현입니다. (충고, 조언, 평가, 판단하지 않고 조용히 묵묵히 행동하기)


4. 교회에 대한 통렬한 반성

이 작품은 은연중에 가톨릭 교회의 어두운 역사에 대한 회개를 촉구합니다. 아일랜드 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의 가톨릭 공동체는 이런 역사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어두움을 기억하고, 묵인했던 침묵을 뉘우치며, 다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붙들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고통과 함께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며, 침묵하지 않는 것,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 결론

클레어 키건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 "사랑 없이 지켜지는 신앙은 무엇인가?"
  • "무엇이 복음을 살리는 것이며, 무엇이 복음을 죽이는가?"
  • "작은 친절이 침묵보다 더 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지 않은가?"

빌은 비록 외롭고, 작고, 소심한 존재처럼 보이지만, 그 한 사람의 행동이 신 앞에서 진정한 제자도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제 교회의 신자로서, 그리고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무엇을 침묵하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말하고 실천해야 하는지 자문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날카롭고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필요하시면, 이 내용을 묵상집이나 교리 강의용으로 요약해 드릴 수도 있어요. 또는 토론 질문지로 바꿔볼 수도 있고요. 원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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